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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보노보 (Bonobo)

평화적 보노보?

by 모콤보소 2013. 1. 8.

평화적 보노보?

 

  이 글을 시작함에 있어 필자는 아직 조국 교수님의 책 '보노보 찬가'를 읽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그리고 이 글은 그의 책을 비판하는 내용도 아니다. 사실 그의 책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나와 있지 않음을 알려둔다. 필자는 단지 보노보에 대하여 세간에 잘못 혹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은 부분을 환기시켜 주려고 이 글을 쓴다. 그럼 시작한다. 참고로 필자는 그를 아주 좋아한다.

 

  한국의 책을 많이 읽을 수 없는 관계로 조권 교수님의 보노보찬가를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인터넷의 서평을 읽으면서 그의 책이 우리 사회의 침팬지 같은 구석을 비판하면서 보노보식의 사회구조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야생의 보노보를 관찰하면서 내린 내 결론은 그들 사회가 과연 경쟁 지향적이 아니고, 또 평화적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가라는 것이다. 실제로 내가 속한 연구자 모임의 한 발표회에서도 나는 이 '평화적'이라는 단어에 의문을 제기했다. 토론속에서 나왔던 의견 중 하나는 다음과 같았다.

 

  "평화적이라는 말을 단위 시간당 발생하는 공격행위의 빈도가 낮다는 것으로 정의하면 침팬지와 보노보를 비교하면 보노보가 더 평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저 말에 사실 동의 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선에서 침팬지와 보노보의 공격행동의 빈도에 대한 정략적 비교 연구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침팬지의 공격행동이 그 빈도가 보노보에 비하여 높다고하여 보노보의 사회가 더 평화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게다가 평화적이라는 말은 너무도 인간 중심적인 면도 있다. 

 

수컷 보노보가 암컷을 공격하고 있다.

 

  보노보를 평화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드는 또 다른 예 중 하나는, 보노보는 침팬지와 다르게 집단 내 혹은 집단간의 싸움으로 상대편을 무참히 죽이지 않는 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나는 쉽게 동의를 할 수 없었다. 집단간의 싸움에 의한 죽임이 없다고 하여 평화적일까? 정말 싸움과 갈등이 없다면 그 사회는 평화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분명 이 분야에서 철학적으로 깊은 생각을 가져보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 백과사전에 평화가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평화에 대한 설명은 이 사전을 참고하시길 바란다. 이 사전에 의하면 평화라는 말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그 정의가 달라져 왔다고 한다. 평화 역시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처럼 들린다.

 

  만약 평화를 단지 전쟁이나 갈등이 없이 평온한 상태로만 정의하면 이는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치부하는 것으로 들린다. 강력한 독재 권력과 공권력에 의해서 사회적 갈등이 표출되지도 못하고 또한 사회적 이견도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상정해보자. 이 사회는 겉으로 볼때는 평화가 유지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게 과연 평화적인가? 나의 이 물음은 보노보를 보면서도 계속 되었다. 과연 이들을 평화적이라고 불러도 좋을까라고 말이다. 물론 이들은 싸움이 발생한다고 하여도 서로에게 심각한 상처를 입히지 않고 대부분 조용하게 끝이 난다. 하지만 싸움 이후에 친화 행동이나 화해의 행동이 거의 없다고 보고 되어 있다. 상대방을 죽음에 몰아 넣는 극단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침팬지에게서는 화해의 행동 (reconciliation) 이 잘 발달해 있는 것과는 극히 대조적이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정량적인 자료에 근거 한 것은 아니지만, 보노보를 보고 있으면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아주 조심스러워 보인다. 이 조심스러움은 나에겐 평화적으로 보이기 보단 무엇인가에 억눌려 있다고 보이는 경우가 많다. 내가 한국 사람이라서 그런 것일까? 물론 그런 이유도 있을 것이리라. 하지만 나는 왠지 이들의 조심스러운 행동이 화해 행동이 잘 발달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암컷들이 연합을 이뤄서 수컷을 공격하고 난 이후, 혹은 높은 서열의 수컷이 다른 수컷을 공격하고 난 이후, 이들은 패배자 수컷을 위로하거나 하지 않는다. 침팬지와는 다르게 한번 싸움이 되어 버리면 오히려 이들은 싸움 이후의 조정에 대해서 무심해 보인다. 물론 어린 보노보들이 위안의 행동(consolation)에 적극 참여하고 있음이 밝혀진 바 있지만 말이다. 싸움을 정말 하지 않기 때문에 화해 행동이 잘 발달해 있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화해의 행동이 잘 발달해 있지 않기 때문에 싸움을 꺼리는 것일까? 물론 이 두개가 맞물려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장 편할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이들 보노보는 책속의 신화처럼 약자를 배려하거나 공존을 중시하는 삶은 살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동물계 어디에도 자신과 유전적인 연관관계가 없는 개체에 대한 인간 이상의 배려를 가진 동물은 없다. 

 

  동물의 행동 (물론 인간도 포함)을 이해하는 데 꽤 좋은 시각은 사회적, 자연적 환경속에서 그들은 혹은 우리는 그들의(혹은 우리의) 방식대로 번식과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영장류 특히 유인원으로 진화의 가지가 확장되면서 그들은(혹은 우리는) 행동의 유연성이라는 선물을 받게 되었다. 물론 이 행동의 유연성을 가지지 않고 있는 동물종은 내가 알기로는 없지만, 큰 뇌를 가진 우리 유인원은 자연환경 뿐만 아니라 사회적 환경에 맞추어 행동을 조절하는데 더 뛰어나나고 할 수 있겠다. 그랬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노력은 그들의 사회를 신화화 하여 자연속에 답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어떠한 사회적·자연적 조건이 그들의 사회 구조에 영향을 주었는지 연구하고, 어떻게 하면 우리사회에 더 높은 행복이 깃들게 할 수 있는지를 논의해야 하는 것 아닐까. 

 

  보노보를 관찰하다보면 가끔 내가 지금 속해 있는 일본사회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때가 있다. 일본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아주 조심스럽고 서로에 대한 배려가 가끔은 지나칠 정도라고 생각 될 때가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일까, 나는 이들이 오히려 상대방에게 무심할 때도 있다고 생각이 든다. 행동을 비용과 이익의 균형으로 설명할 때 특정인에 대한 깊은 배려는 에너지 소모가 (그렇지 않는 행동 방식에 비하여) 높기 때문에, 분명 아주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행해지기 어렵다는 논리를 대입해보자. 이에 동의한다면 내가 가끔씩 일본 사람들에게서 보는 상대방에 대한 무관심을 이해 할 수 있을것이다. 물론 그런다고 한국이 일본보다 낫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는 지나친 배려가 무례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평화적이라고 불리는 보노보. 그들의 지위를 깍아 내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무엇이 평화적인가를 한번 생각해보자는 의미에서 오늘의 글을 썼다. 이견이 항시 공존하지만 동등한 조건에서의 토론과 조율을 통해서 이뤄지는 역동적인 사회환경이 더 평화롭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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