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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구글 애드센스(AdSense)를 시작하다.

by 모콤보소 2023. 2. 1.

이 블로그를 읽어주시는 분들에게는 조금 죄송하지만 약 이 주 전부터 구글의 광고를 달게 되었다. 중간광고는 없이 최소한의 광고만 나오도록 설정을 해두었지만, 애드센스가 마음대로 긴 글에는 중간 광고를 붙이는 것 같다. 설정을 이리저리 바꿔보아도 내 뜻대로 되질 않으니, 일단은 그대로 두려고 한다. 읽는 분들이 불편하시다면 좀 더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려고 한다.

 

승인이 된 이야기를 간략히 해보자면, 지난 1월 4일 구글 애드 센스를 신청하였고, 정확히 2주가 지난 1월 18일 승인이 났다. 이게 뭐라고 2주동안 아무런 연락이 없어서 괜히 불안하였지만 그래도 한 번에 승인이 되었기에 구글이 그래도 날 외면하지는 않는구나 하고 생각이 들었다. 애드센스 신청을 위해서는 어느정도 html를 다루는 지식이 필요하지만 다른 블로그를 참고하시면 어렵지 않게 신청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니, 나는 여기서 신청 방법등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으려고 한다(정리해서 쓰기가 귀찮은 것은 절대 절대 아니다. 정말?). 

 

괜히 구글이 나를 알아준 것 같아 뿌듯하다.우리 뇌의 보상회로는 이런 순간 기쁨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행복과 만족감을 부여한다.

 

그럼 나는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가?

거창한 이야기는 아니고, 본질과 주객전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갑자기 왠 본질이며, 또 주객전도는 뭐냐고? 광고를 설정한 이야기로 시작한 이 글에서 갑자기 이렇게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그리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니, 들어보시라. 물론 쉬운 문장도 자꾸 꼬이고만 마는 내 글 솜씨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글이 되어 버릴 것 같지만.

 

애드센스를 신청하려고 찾아본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금방 이해할 것으로 생각하는데, 애드센스는 애드고시라고도 불린다. 그만큼 쉽지는 않다는 뜻일 것이다. 이에 관련해서 정말 다양한 글들이 인터넷에 널려 있다. 한번에 합격하는 법, 혹은 여러 번 시도 끝에 겨우 겨우 합격한 후기 등, 애드센스를 신청한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 그것만으로도 다양한 서사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저런 후기들을 읽다보니 애드센스 관련한 글들은 크게 두 극단의 분류 체계를 적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팁이라는 이름의 꼼수를 잘 활용하는 방법을 소개하는 부류, 다른 하나는 글만 좋으면 그냥 승인이 나니 꼼수 같은 것은 필요없고 좋은 글을 지속적으로 쓰는 것에 집중하라는 부류가 되겠다.

 

그럼 지금 이렇게 써내려가는 내 글은 어느 카테고리에 속할까? 예상하였겠지만 아마 후자에 가까울 것 같다. 뭐 그렇다. 구글이 애드센스의 본질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구글이 애드센스를 이용해서 컨텐츠를 생산해 내는 사람들에게 회사의 수익을 나눠주는 이유가 뭘까? 단순화 하자면 그것이 그들에게 더 효율적인 비지니스 모델이기 때문이다. 구글이 검색으로 성공한 이유가 더 나은 정보를 제공하는데 있었고, 구글은 그래서 그 시작부터 구글 검색을 이용하는 이가 원하는 정보에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구글 검색의 알고리즘을 개선하고, 양질의 정보를 담고 있는 사이트를 가장 먼저 보여주는 방식을 항상 추구하고 있다. 그 결과 구글의 경우 글이 오래되었다고 하더라도 좋은 글이면 가장 위쪽에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2013년에 보노보에 관해 쓴 내 글도 그래서 보노보 왐바라는 키워드로 구글에 검색을 하면 아직도 첫 페이지에 나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내가 콩고에서 직접 연구하며 찍은 사진도 뜨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구글은 그들의 검색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빠르고 정확한 결과를 제공하여 만족스러운 검색 경험을 선사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양질의 정보를 생산해 내는 사람들에게도 애드센스를 이용해 이익을 나눠주기 때문에, 정보 생산자들도 구글의 검색 체계 안에서 좀 더 나은 정보를 생산하는데만 집중할 수 있다. 이것이 구글의 비지니스 모델이라고 생각할 때, 오리지널 컨텐츠에 들러붙는 노이즈(가짜 컨텐츠 양산자)를 구별하고, 최초의 정보를 생산해 낸 이의 컨텐츠가 구글 검색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도록 검색 알고리즘을 개선하는데 집중할 것임을 예상해 볼 수 있다. 구글이 그런 개선을 게을리 하는 그 순간은 아마도 구글이 그들의 비지니스 모델을 더 이상 지속하지 못하고 이제 구글도 수명이 다하였음을 말해주는 순간이 될 것이다. 그러니 일개 개인이 구글같이 큰 회사가 자기 회사의 사활을 걸고 개선하는 검색 알고리즘을 역으로 이용하려고 해봤자, 짧은 기간 동안은 어떻게 이익을 취할 수 있겠지만, 지속적으로 구글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차라리 그런 노력을 기울일 시간에 자기만의 컨텐츠를 만들어 내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나은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구글의 보상 시스템을 한번 생각해보자.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구글은 기본적으로 지속적으로 좋은 컨텐츠를 생산하는 이가 검색 순위에서 우위를 점하도록 검색 알고리즘을 설정하여 오리지널리티를 가진 창작자에게 인센티브를 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오리지널 컨텐츠 없이 열심히 키워드 같은 것들을 이용해서 꼼수를 부려봐야 단기적인 효과만 나타날 뿐 결국에는 구글에게는 나쁜 컨텐츠 생산자로 찍힐 가능성만 높아질 것이다. 그러니 그런 것에 집중하는 것보다는 그냥 좋은 컨텐츠를 만들고 그것을 개선해가며 구글이 알아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좋은 컨텐츠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키워지면, 그것은 나중에 자기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보자.

구글이 장기적으로 더 좋은 컨텐츠 창작자에게 보상을 주는 이런 인센티브 시스템이 어떻게 창작자를 지원하는지 생각해보고 이를 우리나라의 시험으로 대표되는 정량화된 평가 방식에 빗대어 이야기를 해보자. 우리가 엄청난 사회적 노력을 기울여 만들고 유지보수중인 공정하디 공정한 정량화된 평가 방식인 시험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한 사람에게 주는 보상은 아주 달콤하다. 달콤한 수준이 아니라 그 정점에 선 사람들에 대한 존경과 그에 따라오는 권위를 생각할 때 아주 엄청난 보상이라고 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시험의 점수라는 정량화된 지표가 그 사람이 가진 능력 그 자체보다 우선시 되어버린 상황에서 발생한다. 원래 시험의 본질은 많은 후보 중 특정 역할에 특별히 적합한 인재를 기용하기 위해서 개발되었을 것이다. 즉 시험의 본질은 사람의 다양한 능력을 하나하나 평가하기 힘들기 때문에, 특정 역할에 필요한 능력을 가장 쉽게 알아 볼 수 있도록 개발될 평가 지표로 출발하였을 것이다. 특정인의 능력 중 그 당시에 가장 필요했던 부분을 지수화하여 이 지수를 통해 조금은 쉽게 사람간의 차이를 알아내고, 그를 통해 인재를 골라내는 것에 그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시험으로 만들어진 지표의 상층부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만 유리하게 혹은 그들에게 매우 유리하게 사회의 보상(인센티브) 시스템이 작동하게 되면, 어느 순간 특정 직업군에 필요한 능력을 검증하기 위한 도구로써의 시험의 본래 목적은 점점 옅어지고, 시험 점수라는 지표에서 더 높은 층위를 차지하기 위한 노력만이 남게된다. 여기에 상위 계층에서 그 시험에 대한 출제와 감독을 독점하게 되면, 그 시스템에 순응하도록 사람들은 더 노력하게 되고, 결국 높은 시험 점수의 획득과 그를 통한 사회적 보상의 기대가 대부분의 사람들의 행동 양식을 결정해버리게 된다. 어느 순간 높은 시험점수의 획득 그 자체가 개인이 성공하기 위해 반드시 획득해야할 사회적으로 중요한 재화의 성격을 띠게 된다. 이런 상황까지 사회가 흘러가면 시험은 사람의 다양한 능력 중, 특정한 직업에 필요한 능력을 보여주는 지표로써의 기능은 사라지고, 시험에서 획득한 점수 그 자체가 사람의 능력을 사회적으로 고정해 버리는 이상한 현상이(주객전도가) 발생하고 마는 것이다.

 

특히 시대가 변해 필요한 인재가 바뀌었음에도 이러한 시험에 의한 사람의 능력 평가와 시험 점수라는 계량된 지표로 사회의 보상(인센티브) 시스템이 작동하게 되면, 그런 사회에서 자신만의 능력을 개발하기 보다는, 시험이라는 것에 메달리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에, 모두 다 문제의식을 가져는 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모두가 시험에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버린다. 본래 수만은 능력 중 특정한 능력을 대변하던 하나의 지표였을 시험이, 어느덧 사회의 보상 시스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주체이자 사회 계급 간의 장벽 그 자체이자 이 장벽을 견고히 해주는 도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사교육은 이런 상황에서 시험 성적을 더 빨리, 더 높이 올려주기 위한 차별화된 교육을 제공하고, 어느덧 다양한 인간의 능력보다는 시험에서 높은 성적을 올릴 수 있는 한 쪽으로만 뾰죡하게 다듬어진 스페셜리스트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사교육은 경제적 효율성까지 겸비하여 스페셜리스트가 되는 교육을 받지 못하거나, 그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경쟁자에 비하여 더 수월하게 시험이라는 사회적 장벽을 뛰어넘거나 오를 수 있게 해주는 기회를 제공하고, 이를 통해 더욱 한 쪽으로만 뾰죡한 스페셜리스트가 될 수 있는 사람들 간의 경쟁을 더욱 가속화 한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예를 들어보자. 토익은 영어 사용자의 영어 수준을 평가하기 위해 만들어진 지표로 토익 점수를 제공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보상 시스템은 이 지표를 사람을 나누어, 계층을 만들어 내는데 이용하였고, 점수 그 자체가 갖는 중요성을 간파한 스페셜리스트와 사교육간의 고삐풀린 상호작용이 작동을 하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그래서 그 결과 800점이 넘어도 외국인과 간단한 회화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양산되고 말았다고 생각한다. 800점은 원래 낮은 점수가 아니고, 일상수준에서 영어로 대화하기에 큰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수준으로 정의가 된다. 그런데 한국에서 800점은 높은 점수라고 인정받지도 못한다. 그리고 학원가에 가면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려움을 격는 800점대의 사람들이 꽤 흔하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일상 생활에서 영어로 대화하고 글을 쓰는데 별 어려움을 격지 않는, 영어를 어느정도 잘하는 사람은 공부를 하지 않고도 800점 정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점이 토익 시험이 영어 실력의 지표로 쓰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런데 한국의 사교육 시장은 지속적 문제 풀이와 단어 공부라는 아주 특이한 방식으로 토익 800점 이상이면 기대되는 일상의 영어 실력을 보유하지 않고도 토익 800점 이상을 만들어 내고야 말았다. 와. 정말이지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이런 방식으로 어떻게든 점수를 획득하는 과정이 너무나 신기하다. 그리고 이렇게 획득한 점수는 지표로써 가장 공정하게 나의 위치를 보여주는 것으로, 누구에게나 당당하게 나의 노력의 정당성과, 내 실력을 이야기 할 수 있는 하나의 증표로도 작동한다. 그런데, 그렇게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그 점수를 가지고 외국에 가서 어설픈 영어로 나의 실력의 정당성을 이야기 한다고 생각해보자. 음........모르겠다. 나는 부끄러울것 같다. 하지만 사람은 다양한 법. 나와는 전혀 다른 행동/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조금은 배운 요즘의 나는 나의 이런 생각이 옳다라고 생각하는게 잘못된다는 것 정도는 알겠으니, '모르겠다' 라고 결론 내릴 수 밖에...

 

우리 진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항상 재미있게 논의하는 주제인 evolutionary arms race(진화적 군비경쟁)와 비슷하게 토익이라는 지표를 개발하고 있는 ETS는 이런 신기한 일을 해내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며 항상 새로운 유형을 개발해야 하는 쫓고 쫓기는 군비경쟁(arms race)을 지속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행태를 보고 있으면, 어차피 외국의 많은 회사가 토익 점수만으로는 사람을 뽑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최대한 한국과 일본에서 이익을 높이는 방식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의 한끼 식사가 되기 싫어 어쩔 수 밖에 없이 수행하는, 정말로 목숨을 건 동물세계의 arms race를 ETS가 수행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은 본래의 영어 능력을 평가하기 위한 지표로 개발된 토익 시험이 그 기능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냥 원래의 목적은 버리고, 그보다는 더욱 이익이 되는 한국과 일본 등에 그 시험 자체를 파는 비지니스 모델을 발견하고 그것에서 더 큰 이득을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 같다.   

 

애드센스와 시험, 그리고 본질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자. 원래 시험이 도입이 된 그 시대에는 시험 성적이라는 지표가 아마도 인재를 적절히 등용하기 위해 효율적인 평가 도구로 기능하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대가 흐르고 어느덧 그 지표가 능력 개발의 목적이자 본질이 되어 버리고 만 나머지, 우리는 시험의 원래의 목적은 잊어버린 채 시험만에 매달리게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앞으로 이런 방식의 보상 시스템이 우리사회에 지속되는 한, 시험으로 사람들을 재단하고 그렇게 구분지어진 사람들에게 사회적 재평가의 기회와, 기회 제공의 평등을 앗아가 버리는 사회로의 진행은 더욱 가속화 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항하는 시도들이 꾸준히 있어 왔지만, 젊다고 할 수 있는 우리 MZ들의 많은 이들이 이런 시험을 가장 공정하다고 느끼는 모순적인 상황에서(내가 잘못 본 것이길 바라고 있다) 밝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이제 사람들은 시험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사회적 장벽으로의 실체성과 영향력에 굴복하고 그것에 순응하며 영문도 모른채 열심히 시험 그 자체를 위해 노력하고 이와는 조금 다른 경로를 통해 사회에서 계층 이동을 하려고 하는 우리 옆의 친구들을 잡아 끌어내리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이런 시스템 안에서, 의심하고 질문하는 시험에는 썩 도움이 되지 않는 습관들을 가진 사람들은 상위 계급으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시험은 사회적 허들로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혹자는 아마 시험보다는 대학교의 이름에 의해서 갈라지고, 그리고 그렇게 한번 갈라진 계급에 의해 많은 것들이 좌우되는 우리사회의 계층 이동의 경직성이 더 큰 원인이라고 할지 모른다. 물론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그럼 왜 그렇게 우리는 높은 경직성을 만들어 낸 것일까? 그리고 시험은 어떻게 그런 경직성을 정당화하는데 쓰이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런 질문을 하고 싶다.

 

원래는 필요한 인재를 효율적으로 골라내기 위한 하나의 도구였던 시험이, 이제는 하나의 도구가 아닌, 시험이 우리 인생을 결정지어 버리는 아주 무서운 사회적 장벽이 되고, 시험 성적 그 자체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그 무엇인가가 되어버리는 말도 안되는 상황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가두게 되었을까? 왜 서구와 달리 사람의 한 가지 특성을 알아보기 위한 시험이 아닌, 시험으로 사람을 재단하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평가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조금은 지엽적이지만, 특이하게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내신보다는 수능이라는 것이 더 공정하다고 믿게 되었을까?

 

사람의 능력은 아주 다양하다. 시험을 잘 보는 능력은 한 사람의 다양한 능력 중에 하나일 뿐이다. 누군가는 달리기를 잘하고, 누군가는 노래를 잘하고. 누군가는 또 사고가 깊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능력들은 우리가 치르는 수능 혹은 내신의 정형화된 시험을 통해서는 알아내기가 힘들다. 특히나 만회할 기회를 주지 않는 우리의 시험 시스템을 생각해보자. 정말 중요한 국가단위의 행사인 수능은 일년에 모든 사람에게 딱 한 번만 기회를 주는 것으로 그 공정성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시험 당일의 컨디션에 의해서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는 이런 방식이 왜 내신에 비하여 공정하다고 믿게 된 것일까? 아마도 내신은 만회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압박이 수능보다 더 심해서라는 생각도 든다. 학교를 다시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 한 번 망치면 되돌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도 적어도 수능이, 더 공정하다고 느끼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좀 더 편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닐까? 자기기만 동조되어 사회적 기만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럼 왜 사람의 극히 한 부분 만을 평가할 수 있는 이런 시험을, 그것도 딱 한 번만 기회를 주는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그리고 이런 만회할 기회가 거의 없는 평가 방식이, 왜 나라는 사람 전체를 평가하도록 우리는 방치를 하고 있는 것일까? 조금 비약해서 말하자면, 신분제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인재 등용에 아주 큰 기여를 했던, 그 시대에 알맞았던 도구로 기능했던 과거 제도와 비슷한 면이 있는 수능을 우리는 왜 공정하다고 느끼며, 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다시 구글로 돌아가자. 구글 검색은 구글이라는 회사가 만들어 놓은 하나의 생태계라고 생각해보자. 이 생태계의 보상 시스템은 구글이 생각하는 가장 최적의 비지니스 모델 그 자체이다. 그래서 이 시스템을 교란하는 꼼수에 대해서 구글은 항상 조정자로 활동하며, 그 위반 정도에 빠라 벌을 주기도 하고, 심각한 위반자에 대해서는 기회를 박탈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원작자에게 이득이 돌아가는 이 시스템이 어느덧 가짜로 가득한 가치없는 생태계가 될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나라 시스템으로 돌아와보자. 우리는 그래도 아시아에서 거의 유일하게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독재를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쟁취하였다. 하지만 아직 우리사회는 민주주의를 성취한 이후에 태어난, 독재의 경험이 전혀 없는 세대가 대다수가 아니다. 그리고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북한과의 전쟁을 경험했거나, 아지면 훨씬 이전의 신분제 사회의 영향을 받았던 분들도 같은 사회안에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복합적인 경험을 가진 서로 다른 세대들이 하나의 사회에 모여사는 나라는 전세계에서도 우리가 거의 유일할 것 같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아직 독재와 신분제 사회에서 내려온 사회적 관습들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는 대통령. 그리고 신분제 사회도 아닌데 지위가 낮은 사람들을 대하는 몇몇 상사들의 황당한 태도와 행동. 공정을 울부 짖으면서도 시험이라는 막강한 사회적 재단사의 칼춤에 같이 군무를 추는 가끔은 너무다 비이성적인 내가 속한 MZ의 젊은이들까지. 물론 이런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은, 세대가 속한 환경에 대한 집단으로써는 가장 합리적인 반응일 것이지만. 

 

시대에 따라 환경은 변한다. 그리고 그에 맞춰 필요한 인재도 변한다. 우리 사회가 인재를 적재적소에 넣고 싶은 것과, 그리고 내가 그런 인재가 되고 싶은 것은 타고난 탁월한 보상에 반응하는 우리의 본성이므로, 되려 장려할 만 한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인재가 필요하고, 이에 맞춰 우리가 사람을 선별하는 도구도 진화 해야 한다. 사실 그 도구를 바꾸는 것은 효율성을 중시하고 다양성에 대해서 강제적으로건 자연적으로건 경험을 할 수 없었던 사회에가 쉽게 해낼 수 있는 그런 일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우리나라를 예로 들면, 우리의 시험 시스템으로 우리가 이뤄낼 수 있었던 효율성과, 평균적으로 높은 지적 수준을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한번에 바꾸는 것은 너무 비효율적이니 수능으로 대표되는 우리의 효율적인? 평가 제도에 대한 변경에 대한 많은 저항이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획일적인 시험제도가 아닌 다른 방법을 통해 우리가 어떤 다양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그 말이 갖는 위화감도 사실은 지적받아야 마땅하다. 다양성은 우리가 어떠한 노력을 통해서 성취한 결과로 나타나야 할 무엇인가에 가깝지(그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이야기는 뒤로하고), 그 자체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 혹은 그 무엇인가가 되어야 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열대 우림에 존재하는 생물다양성이 누군가가 요구해서 만들어낸 그 무엇인가가 아님을 알 듯이 말이다.

 

아주 긴 글이 되고 말았지만, 요는 이렇다. 우리가 혹은 우리 사회의 특정 계층이 설계한 우리 사회의 보상(인센티브) 시스템의 방향을 조금만 바꿔보면 어떨까? 조금 아래 계층에서 태어나도, 혹은 아래 계층으로 내려가도 그런 이동이 우리의 존엄을 해치지 않도록 사회가 조금만 따뜻하게, 그리고 약자를 보호해주는 몇몇 장치들을 추가해주고 그것을 지속해주면 좋지 않을까? 그리고 구글처럼 설계된 보상 체계에서 우위에 속한 사람 중에 지나친 꼼수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적당히 속아내는 방법을 계속해서 업데이트 해주면 어떨까? 그리고 이런 꼼수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너무 나쁘게만 보지도 말자. 생물학에서 개인의 우월함을 나타내는 특정한 신호(혹은 지표)가 생겨나면, 그 신호만을 따라하는 전략(복제)도 같이 진화한다. 그런데, 처음에는 신호의 복잡성을 강화하거나 정교함을 강화해서 이러한 신호를 따라하는 전략을 따돌릴 수 있지만, 따라오는 자들이 그러한 복잡성 마저 따라오게 될때, 생물학적 비용에 의해 그 둘을 구분하는 능력은 진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 경우, 진짜와 복제품은 사실 같은 진품의 지위를 얻게 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니, 어느정도 꼼수를 이용하는 자들도 용인하는 것이 맞다. 다만 이들이 너무 판을 치지 않도록, 자정 작용이 가능한 사회로 유지되도록 사회의 건강을 잘 유지해야 할 것이다. 아마 이 부분이 가장 어려운 부분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보의 개방성과 정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법에 의해서 옳고 그름을 따지고 가르기 전에, 우리는 정치를 통해 서로 조율하고 협상하는 방식을 우선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정보는 누군가에 의해서 독점되는 것이 아니라, 개방을 통해서 협상과 조율에 기여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가 정말로 나아지고 있다고 믿는다. 가끔 되돌아 가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미 큰 흐름은 인류사에 의해 정해져 있다고 믿는다. 새벽이 오는 것을 닭의 모가지를 비튼다고 막을 수는 없는 법이기에. 그 큰 흐름에 끌려다니는 우리나라가 아니라, 그 흐름을 타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에, 이렇게 긴 글을 쓰게 되었다. 1주일을 고민하며 쓴 글이니, 업로드 이후에도 조금씩 수정을 가하려고 한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리며 마무리 하려한다.

 

23년 2월 1일. 교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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