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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자제력에 관한 생각

by 모콤보소 2023. 1. 5.

새해가 오면 새로운 계획에 마음 설레던 그 느낌은 언제부터인가 나에게는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 자리를 꾸준함에 대한 아주 가벼운 각오가 대신하고 있다. 그러서 일까 설레임에 반짝하는 것보다는 오늘도 이렇게 블로그에 글을 적는 것으로 나의 꾸준함에 영양을 공급하고 있다.

  

이주일 정도 전의 일이다. 생각해보니 벌써 작년이다.

밤 8시 정도가 되니 배가 고파서 집에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짐을 정리하고, 어느때와 다름없이 내 바구니달린 자전거를 타고 캠퍼스를 달렸다. 학교를 거의 다 빠져나가려는데, 저 앞에서 자전거를 마구 마구 내던지던 친구가 보였다. 주변의 사람들은 그 학생을 보고만 있고, 나는 무슨일일까 하고 내 머리를 굴리기 시작하였다. 그 학생의 행동에 대해서 웃는 사람들도 있었고,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걱정을 하는 듯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여기는 내가 자전거를 주차하는 곳인데, 여기도 꽤나 번잡하지만 자전거를 내동댕이 치던 그 친구가 자전거를 주차한 곳은 정말 자전거가 빽빽하게 주차되어 있다.

나는 생각했다. 왜 저 학생은 저런 행동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고만 것일까? 왜 저런 행동이 나오게 된 것일까?

내가 동물행동학자로 추측하는 저런 행동이 발생하게 된 근인은 이렇다. 아마도 자제력이 바닥이 난 것이겠지. 그리고 그렇게 자제력이 바닥이 난 것에는 아마 안좋은 일이 있었거나, 자전거를 타기전까지 자신의 거의 모든 것을 소모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겠지 하고. 하지만 이런 설명은 사실 과학자라서 틀리기 어렵도록 답을 한 것이므로 사실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답은 아니다. 우리가 과학자로써 어떤 행동을 통계적으로 설명하려고 할때, 사실 모든 변수를 다 끌어와서 설명을 하는것이 능사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변수가 많아질수록 우리는 특정 행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상황에 대해서 잘 설명할 수 는 있지만, 이런 복잡한 모델은 인간의 행동 방식을 예측하는데 있어서 거의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 왜냐면 각각의 변수를 매번 어떤 행동을 예측하기 위해서 다 측정할 수도 없거니와 설령 매번 측정한다고 하더라도 한사람 한사람의 인간의 행동은 그동안 고려하지 못한 다른 요소에의해서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행동학에서 동물의 행동을 예측하려고 할때는, 일단은 독립된 충분한 샘플을 구하려고 하고, 변수는 정말 중요한 몇몇으로 제한을 하려고 한다. 그럴 경우, 우리는 어쩌면 운좋게도 정규분포하는 일련의 반응의 빈도를 얻을 수 있고, 이를 통해서 평균적으로 기대되는 행동 패턴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너무 어려운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다시 자전거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자제력을 다 써버린 저 친구. 하지만 저렇게 남의 자전거를 막 내동댕이쳐버릴때 까지 저 친구는 여러차례 그 행동을 막아줄 인지적인 브레이크(뇌와 신경회로)가 작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저 친구의 행동을 막는데 그 브레이크들은 잠시 작동을 멈추고 있었을 것이다. 원래라면 잘 작동했을 그 브레이크들이 지쳐버렸고, 그저 내 자전거를 빼기 위해 옆의 자전거들을 잠깐 옆으로 밀어내고 싶었을 텐데 아마도 뭔가 꼬여서 내 자전거가 잘 빠져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 친구는 그래서 조금 화가 나서 조금 힘을 줘서 옆의 자전거를 밀었는데, 브레이크가 고장난 그는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힘으로 옆의 자전거를 밀어버린 것일것이리라. 그러다보니 옆의 자전거는 넘어졌고,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내 모습이 한심해 보일 것이라는 것은 알지만 스스로에게도 화가 난 나머지 자제력이라는 브레이크는 호르몬과 신경 전달 물질에 이해서 완전히 차단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 다음은 내 자전거와 엉켜있던 자전거 몇대를 더 내동댕이 친 이후 그 자리를 빠져나오는 것으로 행동을 마무리 했겠지. 그리고 그렇게 그 자리를 빠져나간 이후, 분명이 후회는 했을 것이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그 친구가 이 행동을 통해서, 스스로에 대한 죄악에 깊이 빠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한 번 실수를 했으면, 진정으로 누우치고 그 다음에도 내가 다시 그럴 수 있음을 깨닫고 좀더 조심하여 다시 사회의 일원으로 복귀하면 된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스스로가 저지른 행동에 대해서 후회 대신 자기 기만을 통해서 나는 정당한 일을 한 것이다 라고 마음 먹어 버리거나, 사회가 이런 실수를 저지른 친구에 대해서 지독한 벌(꼭 법적인 처벌만이 아니고)을 내리려고만 하면 어떡하지 하는 점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제력 브레이크의 작동을 막는 것은 사실 쉬운일은 아니다. 왜냐면 적어도 이 글을 읽는 읽고 있을 여러분은 이미 십수년, 혹은 수십년의 경험과 교육을 통해서 이 브레이크를 작동하도록 배워왔고 또 스스로 어떤 행동과 충동을 자제하는 연습을 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의 자전거를 내동댕이 치던 친구의 이야기처럼, 특정한 상황이 오면 우리의 이 자제력 브레이크는 완전히 차단되고 만다. 극단적이긴 하지만 목숨이 위협받거나, 혹은 극도의 화를 내야 하는 상황등이 그러하다. 이런 경우 아마도 우리는 우리가 저 옛날 침팬지와 구분이 안되던 시절 혹은 훨씬 더 이전 공룡 몰래 숨어살던 야행성 포유류였던 시절보다 더 이전에 갖추어졌을지 모르는 신경 회로가 작동하여 자제력 브레이크를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듯 하다. 그리고 이 브레이크가 일시적으로 멈춤과 동시에, 신경세포와 각종 내분비 기관들에서 호르몬과 신경전달 물질들을 폭발적으로 내보내고 우리는 드디어 그동안 우리를 얌전한 사회적 동물로 살아가게 하던 인간성을 가둬버리고 하나의 위험한 야생동물이 되어버린다. 침팬지와 보노보들이 싸울 때를 보면, 이들도 우리와 비슷한 방식으로 자제력 브레이크를 유지하다가 그것을 완전히 풀어버리고 쏟아지는 호르몬과 신경 전달 물질에 몸을 맡기는 것 같다. 물론 이렇게 자제력의 브레이크가 완전히 작동을 멈출 때, 우리는 친구 혹은 나를 막아줄 수 있는 신뢰할만한 누군가가 옆에 있다면 이러한 브레이크의 멈춤이 큰 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 스스로는 통제할 수 없는 방식의 원시적인 시스템을 진화의 과정에서 없애지 못하고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것이 인간의 어두운 면이라는 표현에도 동의하기는 하지만, 또 이러한 시스템이 인간 사회의 평화 유지에도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가 인간의 이런 통제 불가능한 모습을 알고 있기 때문에, 왠만하면 상대방에게서 이런 행동을 유도할 수 있는 지독할 만큼의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칼, 불이 나쁜것이 아니고,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따라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구분 되는 것처럼, 이러한 인간의 원시적인 시스템 자체는 사실 나쁜것도 좋은 것도 아닌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한 집단에 소속되어 어렸을 때부터 집단에서 요구되는 수준의 자제력을 발휘하는 법을 배운다. 가운데 3명의 진지한 표정의 아이들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웃지 않고 자제력을 발휘하는 중이다.

그 평화롭고 웃음이 많은 사람들이 사는 왐바에서, 자기가 불공정한 대우를 지속적으로 받았다고 오해한 평범했던 내 친구이자 동료였던 아프리카 친구의 엄청난 분노와 그로 인해 그가 저지른 행동들에 대해 전해들었을 때, 원시공동체의 인간이 어떻게 서로가 서로를 위할 수 있게 진화할 수 있었는지 다시한번 깨닫게 되었다. 현대 문명이라는 거대한 산 앞에 우리 한 개인은 너무나 작다. 그리고 이러한 현대 문명을 약삭빠르게 이용하는 사람들이 인간의 동물적 본능과 함께 진화한 도덕 감정을 너무나 쉽게 무시해버리는 모습을 뉴스에서 거의 매일 마주하는 것 같다. 그런 이들이 다만 잊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 인간은 현대 문명속에서 진화한 것이 아니라, 저 아프리카 초원에서 도덕감정을 통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적당한 선을 지키며 함께 살아가도록 진화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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