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감회

화장실과 역할극(롤 플레이)

by 모콤보소 2022. 12. 31.

한국에서도 남자 화장실을 많은 경우 여성 미화원분이 청소를 하신다. 그래도 이전에 연구원으로 있던 울산과학기술원에서는 미화원분들이 미리 들어온다고 말씀을 하신 후, 안으로 들어와서 청소를 하셨다. 만약 변기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있는 경우에는, 그 변기는 두고 청소를 하고 나가셨다. 하루에 두 번 정도 청소를 오시기에, 한 번 정도는 안해도 괜찮은 것 같았다. 그리고 울산과학기술원의 화장실은 정말 깨끗하였다. 이건 어디나 그렇지만, 한국의 화장실은 역이나 터미널 같은 곳을 보더라도 외국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깨끗하다. 물론 일본은 우리보다 시설은 조금 낡은 곳이 많지만 아주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다. 가끔은 우리나라의 화장실 보다 더 깨끗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이곳 교토대학교에서 꽤나 불편한 상황이 한 번 있었다. 화장실에 앉아 있는데, 청소하는 분들이 들어오셨다. 이곳 저곳 깨끗이 청소를 하는 소리가 들린다. 화장실을 혼자서 청소하지 않고 감독관과 다른 이 몇명이서 같이 청소를 하기에 이런 저런 대화 소리도 들렸다. 혼자서 청소를 하지 않는 이유가 있는것 같지만 정확히는 모르기 때문에 추측은 생략하기로 하고. 아무튼 감독관이 붙어 있는 상태로 화장실을 청소하는데, 한국은 누군가가 사용중인 자리는 청소를 하지 않지만, 여긴 달랐다. 청소하는 소리는 이제 끝이 났는데도, 이들은 나가지 않고 아무래도 내가 나오길 기다리는 듯 했다. 일부러 불편한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누군가 문앞에서 계속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물을 내리고 나갔다. 그렇다. 나는 물도 내리지 않고 기다렸던 것이다. 물을 내리고 안나오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그리고 어색하게 문을 열고 나가는 짧은 순간, 감독관이 맑은 미소로 인사를 한다. 그리고 청소를 하는 분이 내가 방금 막 물을 내린 변기 뚜겅을 연다. 아....이것은 무슨 기분일까. 나는 왠지 부끄러워진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하고 이해해야 할까.

그냥 아무렇지 않은 듯 손을 씻고 화장실은 나섰지만, 뭔가 이상한 기분이든다. 이것은 흡사 처음 내가 일본에서 대중목욕탕에 갔을 때 여성 스텝이 남탕에서 정리를 하는 것을 보았을때 들었던 기분과 비슷했다. 그래도 그때는 나도 수 많은 남자들 속에 섞여 있었기에 그렇게 심한 부끄러움은 느끼지 않았었다. 충격이긴 했지만.

 

그럼 왜 나는 부끄러워진 것일까. 청소하시는 분들은 내가 이런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에, 내가 나오길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왜 일까. 보노보와 침팬지를 처음으로 야생에서 관찰하며 놀랐던 것은 그들이 아무렇지 않게 방귀를 뀌고, 볼일을 본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고, 더럽다고 생각하는 기색도 별로 없어 보였다. 가끔 그들의 분변에서 소화가 덜된 씨앗을 따로 빼서 먹고는 하기도 하니깐. 하지만 이들도 가끔 신기하게도 손에 묻은 분변을 닦아낼 때가 있다. 그걸 보면, 아마도 위생관념이 아주 없지는 않아 보인다. 그런데 우리는 신기하게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침팬지와 많이 다르다. 아니 적어도 나는 다르다. 그런데 내가 지금 연구원으로 있는 이곳 교토대학의 미화원 분들은 나의 화장실 이용과 그 흔적은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을 해주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지금 청소라는 나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니, 너에게는 아무런 볼일도 없고 너에 대해서 판단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본 일본 문화에서 독특했던 점 중 하나는 개인에게 역할에 대한 충실함이 매우 강하게 요구 된다는 점이다. 이 요구가 얼마나 엄격한지 역할을 수행할 때 개인이 가지고 있는 특성은 지워진다. 각자의 위치에서 맡은 일을 하려면 엄격한 자기 절제가 필요하다. 일본은 이 절제에 더해 조직에서 자신의 맡은 역할을 수행함에 있어 개인성을 완벽히 제거함을 요구받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개인성이 제거된 사람과 접하면서 우리는 부끄러움, 혹은 인간적인 감정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이 사회는 가르치는 것 같다. 우리나라도 그런 방식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는것 같다. 하지만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떻게 자아를 없애고 맡은 역할만을 수행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것이 프로의 자세라고 하더라도 그런 것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그런 비인간적 요구를 할거면 사람을 쓰지 말고 로봇을 쓰면 될것이다. 그런데 내가 자주 마주하는 일본의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그들의 역할에 충실함이 눈에 보인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아마 나도 이곳에서 나고 자랐으면 모난 내 자아가 커다란 벽에 부딫히며 닳고 달아 그들의 방식을 배웠을 지도 모른다.

 

요즘 부캐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을 본다. 아마 새로운 무엇인가에 도전할 때, 자기(본캐)가 가지고 있는 원래의 이미지를 벗기가 힘든경우 그런 시도를 하는 것 같다. 그것도 엄격한 사회에서 개인의 적응 방식일테고, 그것이 자아를 지키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해야하는 것 자체가 우리사회의 엄격함을, 그리고 개인이 사회의 부속으로 이용되며, 자아의 분리를 요구하는 곳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된다. 주어진 혹은 선택하였다고 믿지만 사실은 사회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나의 역할에 지극히 충실하기 위해, 그리고 이 충실함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자아 손상으로 부터 나를 지킬 수 있는 개인의 유일한 해결책이 부캐 혹은 가면이라면, 나는 그 사회가 너무나 걱정스럽다. 다시말해 내가 조직(혹은 일터)에서 수행하고 있는 일종의 롤 플레이(역할극)를 수행함에 있어서 내 자아와 나의 역할을 분리하지 않고는 자아의 상처가 너무 크다면. 그리고 그렇지 않고는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기 힘들다면, 내가 하고 있는 역할극은 인간성을 상실해야만 수행 가능한 그 무엇인가는 아닌 것일까? 그리고 그렇게 역할극에 충실하며, 자아마저 분리시킬 수 있는 사람을 프로로 생각하는 그런 사회를 우리가 지향해야 할까? 인간성을 가진 자아와 역할이 완벽하게 분리되어 버린, 그렇지 않고는 자아의 큰 손상으로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없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는 내가 화장실에서 느꼈던 그런 불편함 혹은 부끄러움은 필요가 없을 수 있다. 그런데 말이다. 정말 우리가 그래도 되는 걸까? 

 

우리는 가면을 쓴다. 가면은 사회 생활을 위해서 중요하다. 마음속의 모든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많은 인간 사회에서 높게 평가하지 않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가면이 파리대왕에서 묘사된 섬뜩한 아이들의 일탈행위처럼, 자신을 숨기고 당당하지 않은 일을 함에 대한 죄책감을 줄이는 역할을 한다면, 우리는 그것은 막아야 하지 않을까. 인터넷이라는 익명의 가면에 숨어서 남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특히 더 그런 생각이 든다. 언제부터인가 뉴스에서 배경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을 모자이크처리하기 시작했다. 뉴스가 우리에게 가면을 씌워주고 사회는 이것을 어느덧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들어 버렸다. 우리 사회는 이제 익명의 가면이 필요함을 국가가 인정해 준 것만 같다. 이런 현상이 서로가 서로에 대해 더욱 신뢰하지 못하고, 점점 더 폐쇠적이 되어가는 사회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같아 씁쓸하다. 왜 사람들이 대중 매체에서 얼굴을 가려주길 원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고, 이에 대한 가설을 설정하고 논의를 하는 것보다, 그냥 얼굴을 가려버리고 마는 식으로 사회가 흘러가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도대체 왜이렇게 된 것일까? 어디서부터 바뀌어야 할까?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말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변화는 나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화장실에서 느낀 부끄러움에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결론을 내보자. 우리가 익명성의 뒤에 점점 더 숨으려고만 하는 그런 사회가 되지 않도록, 아니 적어도 그런 속도를 늦출 수 있도록, 나부터 남들이 맡고 있는 역할을 통해 그들을 평가하지 말고, 조금 더 너그러워져보면 어떨까. 알바생이 휴대폰을 보느라 나의 주문을 한번에 못알아 들었을 수 있다. 그럼 한번 더 말하면 된다. 알바생에게 중요한 개인적인 일이 생겼을 수도 있으니 괜히 시비를 걸지는 말자. 알바생은 나만을 위해서 일하는게 아니고 나의 기분을 맞춰주는 존재는 더욱 아니니. 그리고 알바생도 적어도 돈을 받았으면 개인적으로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우선순위를 둬 보자. 이게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그리고 나서 불만족이 있겠지만 서로에 대해서 평가는 유보하도록 하자.

 

한국에 가끔 돌아가면 남을 평가하는 사람들 때문에 불편할때가 있다. 특히 미용실에서 많이 불편할때가 있다. 내 머리가 어떻든, 내가 머리를 어떻게 하고 다니든 왜 그것에 대해서 나를 평가를 하는지. 무심코 누군가에게 하고마는 비교의 말들, 그것들은 일정부분 내가 너를 평가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평가는 우리 인간에게는 평판이라는 것에 신경쓰는 인지회로를 건드려,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 그렇게 우리는 사회적 동물로 진화했으니깐. 하지만 머리 모양, 외모 이런것들로 남을 평가하는 것은 우리가 그저 저 옛날 침팬지와 비슷하던 시절부터 진화해온 본능적인 인지/보상 회로에만 충실한 채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 말해준다. 그래도 우리는 지구상에서는 그나마 조금이지만 이성이라는 것으로 이런 동물적 본능과 맞설수 있게 된 존재인 인간 아닌가. 생존과 번식에 유리했던 인지적, 신체적 선호만 가지고 그것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은 사실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렇게만 살아가는 것은 아쉬운 일 아닐까?

반응형

'감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시 저장 글이 다 사라지다.  (0) 2023.12.15
교토에서 식칼을 갈면서 3  (2) 2023.01.02
교토에서 식칼을 갈면서 2  (0) 2022.12.30
교토에서 식칼을 갈면서  (2) 2022.12.29
다시 일본 생활  (2) 2022.12.2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