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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회

교토에서 식칼을 갈면서

by 모콤보소 2022. 12. 29.

지난 11월 일본에 와서 정착하며 식칼을 샀다. 괜찮은 식칼한번 써보자 하며 내딴에는 거금인 3500엔을 들여 시모무라 공업의 몰리브덴/바나듐 강의 식칼을 구매하였다. 처음으로 사보는 나에게는 비싼 식칼에, 대파를 써는 스스로가 행복해지는 것을 경험했다. 가볍고, 아주 날카로운 칼날이 신기했다.

새로산 칼에 슥슥슥 베어지고 마는 대파들

요리프로그램을 보면 칼질을 어쩜 저렇게 잘하나 했는데, 좋은 칼로 바꾸고나니, 자취 경력 10년의 나도 한칼질 하는구나 하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한 달 정도 사용을 하다보니, 슬슬 칼날이 무뎌진것 같아 칼을 갈고 싶어졌다. 그래서 내 아내가 이전에 알려주었던 간단한 롤러형 칼갈이를 구매하게 되었다. 칼을 산곳에서 팔고 있었으니, 그것으로 사면 되겠지 하고 깊은 생각없이 주문을 했다. 칼이 다시 새것처럼 잘 들 것으로 생각하며, 1400엔을 쓴것은 안비밀.

그래서 샀다. 문제의 롤러형 칼갈이

그런데, 설명서 대로 쓱싹쓱싹 10번씩 왕복을 하고 파를 썰려고 파 위에 칼을 올렸는데...이럴수가 파가 칼을 밀어내는 것이다. 이럴수가. 이것은 내가 지난 10년 동안 값싼 칼로 대파를 썰던 그 느낌 그대로, 아니 그보다 더한 대파의 반항 그대로였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대파의 반항이란....혹시 왕복 횟수가 부족해서 그런것은 아닌지 10번이 아닌 20번, 30번, 40번을 왕복해가며 칼을 테스트 해보았다. 조금은 나아지는 느낌이었지만, 이전의 사각거리며 대파가 칼을 받아들이던 그 느낌으로 절대 돌아가지 않았다.

 

이때 깨달았다.

또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었구나 하고.

 

그냥, 칼이 조금 안들어도 그대로 썼으면, 나는 돈도 버리고 시간도 버리는 이런 짓을 하지 않았을텐데 하고 후회가 생겼다. 그런데 말이다. 조금 생각해보자. 왜 이런 방식으로 후회를 하게 되었을까? 일정부분 이런 후회는 우리가 스스로가 만들어낸 comfort zone(안전지대)에 머무름을 정당화 해주거나, 혹은 스스로의 안전지대에 머무름의 연료(동기)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런 방식의 후회가 우리가 스스로를 comfort zone에 머무르려고 하는 동기로 작동하도록 진화했다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 재미난 깨달음이 된다. 진화는 역시, 우리의 발전이라는 것보다는 어쩌면 진화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던 일에는 안전을 추구하도록 우리의 동기를 디자인 해놓은 것일 지도.

 

이런 종류의 행동을 하고, 이후에 후회를 하는 사이클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이것이 내 습관으로 굳어진 것 마저 깨닫기가 너무 힘들어 나는 이제서야 나에게서 이런 습관을 발견했다. 그래서 결정했다. 이런 방식의 후회는 더 이상 나에게 좋은 것이 아니여야 한다고. 사실 칼이 조금 무뎌지더라도 그냥 썼으면 이런 후회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나에게 아주 큰 힘을 주는 자기 기만을 이용해서 점점 무뎌지는 칼을 보면서도, 좋은 칼을 샀으니, 그래도 이만큼 쓸 수 있는것이지 하면서 행복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혹은 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내가 칼을 갈 숫돌을 사기위한 스스로에 대한 뽐뿌질도 아님을 분명히 하기로 했다. 그래 나는 이 기회에 칼을 가는 방법을 제대로 익힌 사람이 되려고 마음 먹었다(연구에 이렇게 진심이어야 할텐데...). 물론 이렇게 나의 빛나는(반어법이다) 이성에 기댄 결정이, 진화와 경험이 만들어 놓은 기존의 내 행동 방식보다 합리적인가에 대해서는 앞으로 알게될 것이다.  

 

그래서 또 아마존을 뒤졌다. 엇. 나의 필요를 알아서일까? 구글의 안드로이드가 열일을 해주어서 그런지 아마존에 들어가자 마자 할인된 가격이라며 양면 숫돌을 권장한다. #1000, #6000이라는 숫돌의 고운 정도?를 나타내주는 숫자까지 보여주며 평소보다 20프로 할인된 가격에 이것을 사라고 알려준다. 와.....세상에, 이렇게 세상이 내 뜻대로 돌아가는 구나. 누군가는 예전에 그랬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자신의 적인것 같다고. 그런데 나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날 도와주는 것 같다. 구글과 안드로이드에게 사육당하는 가축이 된것 같은 느낌은 내가 칼갈이 마스터가 되는 부푼 꿈을 가지고 그냥 잊어버리자.

 

이렇게 또 1500엔을 소비하였다. 이로소 칼값과 비슷한 돈을 칼갈이 도구를 사는데 소비하게 되었다.

드디어, 도착한 숫돌. 이야기가 길어지니, 이 숫돌을 사용한 이야기는 다음화로 넘겨야겠다. 결론부터 미리 예고를 하자면, 이것으로도 만족스러운 결과는 얻지 못하였다. 결국에 나의 이성은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일까? 다음화에서 더 이야기를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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