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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회/동물행동

자전거는 차도에서? 인도에서?

by 모콤보소 2023. 1. 18.

지난 글인 '잘하는 일은 쉽다'에서 나에게 차도에서 자전거를 타는 일은 아직 어렵다고 말하였다. 아직 내가 잘하는 일은 아니라는 증거다. 거기서 다 못한 이야기를 이어서 하려고 한다.

 

교토에 오면서 나는 차도에서 자전거를 타려고 노력하고 있다. 왜냐면 자전거를 타는 나보다 '약자'인 '보행자'에게 해가 되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왜 자전거를 타는 나에 비하여 보행자가 약자가 되는지는 계속 읽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교토에서 살기 이전, 대학원생으로 살았던 아이치 현의 이누야마는 아주 작은 도시였다. 그래서 인도를 걷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또 자전거 도로와 인도가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인도에서 자전거를 타는 게 이상하지 않았고 미안한 마음을 느껴본 적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곳 교토는 인도에 통행하는 사람도 많고, 그래서 인지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곳과 없는 인도가 잘 구분되어 있다. 그런데 사람들 대부분은 이 구분을 무시하며 인도에서 자전거를 탄다. 

 

왜 그럴까?

굳이 사람들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이, 너라면 인도에서 안타겠냐고 오히려 반문을 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왜냐고? 인도에서 자전거를 타는게 자전거를 타는 '나'에게 안전하기 때문이다. 법으로는 분명 금지되어 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죄책감 없이 인도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고 보행자들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한 번 생각해보자. 일단 나는 사람들이 인도에서 자전거를 타는 것은 적어도 일본에서는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인도에서 자전거를 탈 때 나는 보행자에게 피해를 입히는 가해자가 될 확률이 높아진다. 보행자는 어찌되었건 나의 자전거에 직접 부딪힐 것이고, 그리고 나는 이미 줄어든 속도로 그 사람과 부딛히거나 나가 떨어질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자전거를 차도에서 타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차도에서는 나는 가해자보다는 피해자가 될 확률이 높아진다. 같은 잘못을 하더라도 차도에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자동차를 타는 사람보다 당연히 더 큰 피해도 입을 것이다. 즉, 내가 어디에서 자전거를 타느냐에 따라 내가 강자가 될지, 약자가 될지가 정해지고 만다. 여기서 우리의 딜레마가 발생한다. 나 스스로를 약자(불리한)의 위치에 놓는 차도에서 자전거 타기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내가 강자(유리한)가 되는 인도에서 자전거 타기를 선택할 것인가. 대부분은 이 상황을 딜레마라고 인식하기도 전에, 그냥 인도에서 자전거를 탄다. 즉 의식의 수준으로 들어오기도 전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인도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다. 그리고 이 선택은 자전거를 타는 나의 입장에서는 합리적이다(자기합리화). 이는 너무 당연히도 진화가 우리에게 남겨준 동물적 본능 즉, 위험을 회피하는 본능에 따르는 행위이고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이 행위에 대해서 어떤 불편함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거나, 한 번쯤은 생각해보지만 남들도 다 그러고 있으므로 그냥 나도 내가 편하고 안전한 방식으로 자전거를 타게 된다. 

 

그럼 이런 식으로 인도에서 자전거를 타는 행위가 나에게 합리적이니, 그 자체로 정당하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나? 물론 아니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도에서 자전거를 타는 이 상황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일본 사회의 힘의 역학 관계와 그 역학관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행동)과 태도를 이야기 하고 싶다. 이는 일본 사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한국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아니 지금의 한국에 더 잘 적용이 될 것 같기도 하다. 

 

누구도 당당하게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지는 않겠지만 자전거에 올라탄 나라는 사람은 인도위에서 보행자보다 강자가 된다. 그러니 안전한데다 역학 관계에서 볼 때도 강자가 되는 인도에서 자전거 타기를 우리가 굳이 그만 둘 이유가 없다. 즉 이런 행동을 바꿀만한 동기는 자발적으로 생길 수가 없다. 누가 강자가 되거나 강자에 편에 서서 내 이익을 취하는 것을 마다하겠는가. 우리는 이러한 역학 관계와 사회 구조 속에 녹아있는 관습 속에서 강자와 약자에 대한 의식없이 그냥 일상을 살아간다. 다시말해 이러한 역학 관계는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의식적인 노력 없이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나도 보노보와 침팬지를 연구한 연구자, 그리고 한국인으로 일본에서 살고 있는 이러한 환경 덕에 아주 작은 부분들이지만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것일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지난 몇 년간 50, 30의 자동차 속도 제한에 대해 논쟁이 많았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어린이 보호구역에 대해서도 뜨거운 논쟁이 아직도 계속 되는 것을 볼때, 강자 중심의 역학 관계를 중시하는 사회 구조가 한국이 일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아 보인다. 특히나 강자의 입장을(인도위의 자전거 혹은 어린이 보호구역의 자동차) 대변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행동과 말을 볼 때마다 우리 사회가 역학 관계에서 강자의 위치에 서거나 서려고 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인 것 같아보여 씁쓸하기만 하다. 특히나 자전거와 자동차의 운전 방식을 보면 우리나라와 일본은 대놓고 티를 내지는 않지만 강자가 중심이 되는, 힘의 논리가 통용되는 사회처럼 보인다. 좀 더 직설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우리와 일본은 아직 강자의 입장에 선 사람들을 약자가 조심해야 하고, 그것을 또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사회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런 형태의 사회는 아주 오래전 우리가 진화한 정글 아니 사바나에서의 법칙이 그래도 적용되는 아주 지극히 인간적인?(반어법이다) 사회이기도 하다. 우리가 원시의 사바나에서 빠져나오고 민주주의와 현대문명이라는 새로운 옷을 입고는 있지만, 적어도 우리와 일본 사회는 이런 진화된 강자 중심의 역학 관계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닐까?

 

영장류에서 진화한 우리는, 침팬지나 보노보처럼 본능적으로 높은 혹은 좋은 지위에 대한 선망, 그리고 그 지위를 차지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성차와 개인차가 존재하지만, 이런 동기가 전혀없는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그런 사회를 나는 지금까지 본적이 없다. 그럼 어떻게 이렇게 진화한 강한 것에 끌리는 우리의 원초적 자아를 조금은 더 현대적인 자아로 바꿔줄 수 있을까?

 

사람은 인센티브에 반응을 한다. 그리고 역학 관계에서 내가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는 그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서 부던히도 노력한다. 이 노력은 우리의 동기 혹은 끌림이 그렇게 진화적으로 프로그램되어 있기에 너무 자연스러워서 굳이 힘을 들이지 않아도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을 한다.  그럼 그렇게 하면 된다. 인도의 보행자가, 어린이 보호구역의 어린이가 더 우위에 서는 힘을 갖도록 시스템을 수정하면 된다. 서구에서 하는 방식을 잠깐 보자. 예를 들어 보행자가 길을 건널때 자동차 사고가 나면 그들 사회에서는 자동차 운전자에 대한 엄청난 패널티를 부여한다. 이 패널티 때문에 보행자는 오히려 강자가 되고, 또 어린이도 강자가 된다. 사람들은 사회가 그렇게 부여한 인위적이긴 하지만 뒤바뀐 역학 관계를 너무나 쉽게 파악하고 그것에 순응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우리가 가진 선한 의지만으로 약자를 배려하라고 말해봐야 몇몇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공허한 울림으로만 들릴 뿐이다. 

 

다시 내가 차도에서 자전거를 타려고 노력하는 그 이야기로 돌아가자. 나는 이렇게 발견한 역한 관계에서 강자가 되기 보다는 내가 정한 약자가 되는 규칙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니 그것이 비록 두렵더라도 시행하는 것이고, 이 시행을 위해 최대한 안전하게 자동차의 옆을 운전해서 다니는 방법을 연구하고 또 배우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이용해서 사고의 확률이 낮고, 사고가 나더라도 최대한 나에게 피해가 되지 않을 방법을 하나하나 배워가며 자전거를 타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인도로 다니는 것보다는 나에게 위험하기에 - 그렇다. 다시 말하지만 차도로 다니면 나에게 위험하다. - 사고의 확률을 낮추기 위한 여러가지 방법을 익혀야 한다.

 

아직 안전을 위한 규칙들을 만들고 있는 중이지만, 몇가지 적어보자면,

 

1. 자동차가 적고 천천히 다니는 골목길을 주로 이용한다. 

2. 상황이 조금이라도 여의치 않으면 인도로 들어서며 자전거에서 내리거나, 자전거를 멈춘다.

3. 야간에는 후미등과 전조등을 켠다.

4. 음주운전이 늘어날지도 모르는 야간과 차가 아주 붐비는 아침 시간대에는 되도록 자전거를 타지 않는다.

5. 술을 마시면 절대 자전거를 타지 않는다.

6. 그리고 헬멧을 착용한다(아직 착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등이 있다.

 

아마존에서 1700엔에 산 후미등(전조등 포함)을 붙이고 있는 나의 자전거


나도 인간인지라, 나 자신을 약자의 포지션에 놓고, 그리고 그를 위해 자신을 통제해야 하는 이런 시도가 쉽지가 않다. 특히 주변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은 아닌지 자꾸 신경이 쓰여 스스로 포기하기 쉽다. 그래서 내가 권하는 것은 나를 남과 비교하며 우울해지거나, 혹은 우쭐해 하지도 말고 그저 하루 하루 내 길을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작은 나만의 공간에 관련해서 이런식의 글을 써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집단에서 다수가 선택한 방식을 따르는 것은 합리적이지만 집단 내 소수자 혹은 집단 내 약자에게는 그러한 선택지가 주어지지도 않았을 수 있음을 한번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사회가 인센티브와 패널티를 적절히 이용해 약자라도 사회적으로 강자와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개선하는 노력을 하도록 나부터 작은 실천을 해보면 어떨까?  그리고 그렇게 약자에 대한 지원으로 그들이 대등하게 사회에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 나는 인류가 발전해온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난 수백만년의 진화를 통해 적어도 침팬지나 보노보처럼 선형적이거나 Despotic 한 서열관계가 바탕이 되는 수직적 사회구조에서 점점 더 멀어져왔지 않는가. 이런 진화적 흐름과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평등이라는 가치에 대한 수호를 위해서도 우리가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역학 관계에 대해서 의문을 가짐이 조금은 더 옳지 않을까? 

 

차도에서 자전거를 타는 일은 아직 나에게 어렵다. 즉 내가 잘하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이 조금은 쉬워질때까지 계속 할 것이다. 혹시 아는가. 나같은 사람이 조금 더 늘어나 더 많은 사람들이 차도로 나와서 자전거를 타고, 그 덕에 자전거를 타는 모든 사람들이 좀 더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면 사회적인 비용이 하락하지 않겠는가. 또 차도에서 자전거를 타는 이들이 늘어날 수록 차도에서 더 강자인 자동차 운전자들과의 역학 관계도 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역학 관계가 변하면 자전거를 타는 사람에 대한 자동차 운전자들의 배려가 더 나아지지 않을까? 물론 그때까지 조심조심해서 자전거를 타서 이런 내 결정이 어리석은 결정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몇일전 전영애 선생님을 kbs 다큐에서 보았다. 그분이 하신 말씀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괴테의 문장을 인용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바르게 산다고 꼭 손해 보고 사는 거 아니에요. 살아봤더니 바르게 살아도 괜찮아요."

 

이런 말씀을 담담하게 하는 선생님께서는 저 말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노력하고 살고 계실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누군가의 바름이 누군가에게 그름이 될 수 있는 그런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우리 자신이 정한 바름을 묵묵히 행하고, 그것을 일상에서 향기롭게 피워내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보자고 말하고 싶은 것 뿐이다. 그런 사람에게서 나오는 빛은 등대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쉽지 않겠지만 우리의 행동과 매일 마주하는 일상의 관계 속에서 나도 모르게 강자 중심으로 생각하고 그 역학 관계를 이용해오지는 않았는지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이 한 번쯤 생각해보면 어떨까 한다. 그리고 만약 자신에게서 그런 모습을 발견한다면, 나에게 있는 바이어스를 돌아보며, 약자의 입장에 선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한 번 생각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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